고양이가 담 위에서 볕을 받고 나른하게 눈을 가물거렸다.
눈 주위를 조였다 펴기로 올려다보는 나를 가늠했다.
내 등에도 고양이 등에도 내리는 볕이 따뜻했다. 간질거렸다.
간질간질 따뜻한 볕이 내려앉았다.
나른해졌다가 긴장했다가 애틋했다가 안타까왔다가 간절했다가 부끄러웠다가 달아올랐다가 아찔했다가
볕 아래 강렬한 담담한 순간들,
어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볕처럼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폐허에서 새로운 세상을, 혁명의 꽃을!
“대안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혁명입니다.”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읽다가 순간 피가 끓었던 대목이 다시 떠올랐다.
옮겨보면 국제연맹이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평화의 대안이 된다, 국제연맹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는 모 교수의 결론에 스콧 니어링은 입을 뗀다.
“대안은 있습니다.” 나는 이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한 나라의 정부란 국민의 동의로부터 정당한 권력을 도출해내는 기관입니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라도 만일 이러한 과정을 무시한다면, 그런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는 것은 곧 국민의 권리입니다.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국민의 당연한 권리인 것이지요.” 나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대안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혁명입니다.”
혁명의 목표와 결과가, 플레이타임의 화면을 채울 듯한 사진 후경의 건물 숲은 아닐 것이다. 지나치게 미끄럽거나 일직선인 건물의 내 외부에서 윌로씨는 늘 현기증을 느꼈으니까. 게다가 이 공사장의 폐허와 널찍한 공허는 위세 등등한 건물들의 뿌리가 비어있고 파헤쳐져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자크 타티는 현대화와 그 문명의 바닥을 꿰뚫어 본 사람이었고, 그 통찰을 자신만의 현대성으로 보여준 감독이었다.
이 공사장에는 곧 또 다른 현대문명의 첨단 건물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윌로씨는 어디로 갈까. 그가 머무는 세상은 점점 밀려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새로운 세상. 혁명으로만이 만들어질 수 있는 세상, 혹은 그 자체가 혁명인 세상. 비바 레볼루션. 비바 2012.
그러니까 결국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짧은 인생, 슬퍼하고 아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사랑하자, 사랑하자, 힘껏 사랑하자, 는 다짐으로 언제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상처 받을 때마다 결국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야 말것을 아는 상태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오기까지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 발성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흐느끼며
웅크리고 웅크리고 웅크린다.
패배가 뻔한 전쟁을 벌이는 마음 속은 기시감과 기시감의 싸움판. 기시감이 기시감 위에 시체처럼 포개진다.
결국 결국에는
폴 오스터가 어둠 속의 남자, 에서 웅얼거린 누나처럼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누나는 상심하여 죽었다. 사람들은 상심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정말로 심장이 깨져서 죽는 것이다.”
상심하여 심장이 깨져서 죽을 나의 미래와 미래의 죽음은 이미 도래했고,
상심하여 심장이 깨져서 죽을 미래와 죽음으로 매일 매일 다가가고 있다.
나는 왜 삶을 연명하고 있는걸까. 빤한 인생, 기대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인생을
국도 반찬도 없이 먹는 밥처럼 꾸역꾸역 씹어 삼키고 있는 걸까.
내 삶이 기대가 머물 곳을 마련하지 못한 걸까,
기대가 내 삶에 머물지 못하는 걸까.
기대가 착륙할 자리를 찾지 못한 건 혹시 내 기대에는 다리가 없어서 일까.
내 기대는 원래 다리가 없는가, 누군가가 잘라낸 걸까.
내가 내 기대의 다리를 자른걸까.
이상한 토요일 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피터 비스킨드의 헐리웃 문화혁명, 을 펼쳤다. 보니와 클라이드, 의 제작비를 지원받기 위해 워렌 비티가 워너브라더스의 잭 워너에게 무릎을 꿇은 에피소드였다.
어느 날 그는 워너를 그의 사무실에서 잡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대령님!” 누구나 워너를 대령이라고 불렀다. “구두에 키스하겠습니다. 아니 구두를 핥겠습니다.”
“이거 왜 이래. 일어나라구.”
“아서 펜과 삼삼한 각본이 있습니다. 160만 달러면 만들 수 있습니다. 설사 아무 것도 아니더라도 삼삼한 갱스터 영화가 될 겁니다.”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워너는 다소 민망했다.
“야, 임마. 너 대체 왜 이래? 빨리 일어나지 못하갔어?”
“이 영화제작을 허락하실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되지도 않는 수작 집어치워. 안돼!”
잭 워너가 자신을 증오하고 만나지 않으려는 걸 워렌 비티는 알았다. 그래도 비티는 워너를 기다리고 무릎을 꿇고 다리를 잡았다.
나에게도 간절한 일이 있다. 그것들로 마음을 끓이고 태운다. 하지만 그래서 무릎을 꿇어봤는지 자문하니 나의 간절함은 가짜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걸까. 혹은 내가 어떤 절실함을 잃어버린 걸까, 라는 질문은 감정이 아니라 신체적인 혼란을 주었다.
저녁에 극장에서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를 보았다.
한 여인이 성당에 들어간다. 여인에게 한 남자가 간절하게 바란다면 무릎을 꿇으라고 이야기한다. 여자는 무릎을 굽히는 제스쳐를 취해보려다가 일어서버린다. “못하겠어요.”
그녀는 간절하지 못했던 거다. 거기까지였던 거다.
무릎을 꿇으라, 너의 간절함을 보이라.
권면일까, 명령일까. 혹은 제안일까, 약속일까.
간절하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작년 이맘때 뭘 했나 봤더니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에 다녔었다.
참 열심히 다녔었다. 합정에서 종로까지.
바르다의 영화로. 열띤 호응으로.
난방기를 켜기 전이라 덜덜 떨면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감기 걸렸다는 누군가의 항의도 받았었다.
개인의 기억이 극장과 영화와 너무 끈끈하게 묶여있다. 분리가 불가능하다.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이젠 영화가 재미없고 몰입이 안된다는 애들이 많아요 저도 그랬었구
하지만 재미는 무서울 정도로 무한하게 자생하고 번식하더군요 자신의 에너지가 차단하는거같애요
현재 가장 핫한 젊은감독들이 만드는 최신 한국영화는 어떤지 보고.. 독립영화에 섞여나오는 현장음 듣는것도 신선하고.. 저도 adso님처럼 클래식으로는 언제 뚫릴까요
아마 취향이 아니실텐데 '유감스러운 도시' 추천하고싶어요 케이블에서 자주 하는데 흐르면 한번 보세요 제가 아주좋아해요 어떤애가 그렇게 좋다는데 한번 이런식으로 보셔도 좋구 '홀리데이 인 서울'도 그랬는데 약간 외국영화를 흉내내면서~ 그안에 서울에서만의 비애감이 있는점이 포인틉니다
사실은 딱이 클래식이라고 분류될만한 취향은 없어요. 단지 한정된 시간을 쪼개서 억지로 혹은 습관으로 '우리 극장'에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다른 극장에서 하는 영화 보러 갈 시간까지는 잘 못 내고 있는 것이고요.
제 영혼 한 조각은 거기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좌석에 쭈그리고 어둠에 파묻히는 것, 옴짝달싹 못하고 잡혀있는 시간. 그 썰렁하고 불편한 곳에서 보는 빛의 매혹. 그리고...
근데 정말 거기서 하는 영화, 끝내주는 거 많아요. 벅차고 기뻐서 뱅뱅 돌고싶게 끝내주는 작품들. 그게 클래식이어서가 아니라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한 진짜 영화들이 주는 그런 미칠 것 같은 감흥들이요.
'유감스러운 도시' 예, 시간 날 때 보겠습니다.
“나는 수년간 지도 위에 표시되지 않은 나라들을 돌아다니고 수없이 도망 다녔다. 좌표도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 이 어둠이 빼곡히 들어찬 세계에서 내가 얻은 경험이 언제나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이 보이지 않는 지방의 포도밭에서는 젊은 정신을 취하게 하는 검은 포도주가 생산된다. 요컨대 나는 어디에도 두기 어려운, 일종의 기밀부서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던 셈이다.”
“사랑하기, 서서 잠들기, 기적을 기다리기…… 이런 것들이 나의 유일한 정치(政治)였다. 그런 내가 잠시 쉰다고 한들 무슨 잘못이랴. 대륙을 돌아다니고 다른 사람들처럼 철로와 선박을 이용한다고 해서 온당치 못할 것이 무엇이랴?”
그리하여 ‘필리어스 포그’ 장 콕토와 ‘파스파르투’ 마르셀 킬은 길을 나섰다.
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의 길을 따라가는 두 사내의 이야기를 왜 집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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